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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뉴스

병상체험수기 공모전 당선작

조회수 : 3142 작성일 : 2009-05-18

병상체험수기 공모전 당선작

   함춘시계탑 편집팀에서 창간 30주년을 맞아 진행한 병상수기공모전 심사결과, 대상과 금상 그리고 장려상 등 총 8편의 수기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대상을 수상한  윤강신님의 'ET 아빠'는 간이식을 받은 환자 자신의 체험이 사실감있게 표현되어 있고 확보된 장기를 이송하기 위한 의료진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금상에 선정된 조혜영님의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동행'은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애틋한 사연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와 함께 윤희경님의 '당신 생각이 다 옳았습니다', 김성애님의 '기다림의 끝은 희망입니다', 조진순님의 '고운님을 남겨놓고...', 강한결님의 '재기를 꿈꾸며', 이영순님의 '나를 철들게 하는 병', 허연임님의 '만약에'가 각각 병을 극복해가려는 환자와 보호자의 의지와 과정을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장려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대상작 전문으로 소개하오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공모전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함춘시계탑 편집위원회>
                                                

(대상작) ET 아빠    -윤강신-  
  “장기를 이식해 주기로 하신 환자분 형님의 간 상태가 좋지 않아 이식을 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군요...!!”   고개를 떨구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 속에는 절망이 실려 있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 입니까? 이식을 할 수 없다니요?”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환자 형님분의 간에 문제가 있어 어쩔 수가 없군요. 만약 이 수술을 그대로 시행할 경우 환자도 형님분도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청천병력이었다. 보통 사람의 간은 좌엽과 우엽이 7:3정도의 크기로 되어있어 어느 한쪽을 생체이식해도 문제가 없는데 형님의 간은 8:2정도의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할 경우 두 사람 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달전 간이식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치의의 말씀을 듣고 형님은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자신의 일부를 나에게 주기로 했었다.  

  “어이! 아우! 나는 허구한날 술만  마셔서 간이 어쩔랑가 모르것따! 그래도 아우가 아프다고 헌디 간이 문제여! 간 할아버지라도 줘야재! 이랄줄 알았스믄 술 쪼깐 덜 묵을 것인디! 미안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걱정 말라고 나를 위로하던 형님이었는데, 옆에 같이 있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형님의 얼굴은 금새 새파랗게 변했다.    
  “아니! 선상님! 간은 짤라내도 금시 본래대로 커진다든디. 뭔 일이다요??”  .......................   .......................  모두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워메! 무슨 일이다냐?~”  형님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인양 주치의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쳐다 볼 뿐이었다.   
  그랬다. 설마 설마하며 기다리던 형님의 검사결과가 자꾸 늦어질 때 불길한 생각도 들었지만 형님의 건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와 아내였기에 솔직히 만약의 경우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었다.  “선상님! 수술 합시다. 뭔 문제 있것소?”  

  형님은 계속해서 매달렸고 아내와 어머니는 이내 모든 것을 깨닫고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좀 세밀하게 검사를 했겠는가! 이틀을 검사해서 나온 결과인데...... 인정해야 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인정이고 뭐고 그냥 이대로 고통없이 죽고 싶었다.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한참을 울었다. 아내는 우는데 나는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2달 동안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매일 계속되는 관장과 복부와 온몸의 통증, 더불어 따라 온 불면증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 고통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했다. 분명 저녁 11시에 잠을 자려고 애쓰다 ‘한참을 잤겠지’하고 눈을 떠 시계를 보면 고작 30분이 지났다.   

  그때부터 아침까지 온갖 통증과 싸우며 뜬눈으로 날을 새기를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얼굴은 이제 사람이 아니고, 침대 어디에 몸을 기대어도 아팠다. 뼈만 앙상히 남은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나오는 방법을 잊어버려 1시간씩 갇혀있다 온 가족이 찾아나서고 새벽 4시에 난데없이 축구경기를 한다며 TV를 켜라고 간호사와 싸우며 실랑이를 벌이고, 화장실 간다며 병실에 있는 냉장고를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볼일 보는 자세를 취하는 창피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급기야 11+3, 7-3 등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도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고 시계를 보아도 지금이 몇시인지, 큰바늘과 작은바늘의 구분을 하지 못했다. 간에서 암모니아 가스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뇌로 나쁜 가스가 올라가 혼수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어떤 때는 앞에 사람이 있는데 “누구세요!”하고 물어보았다. 어머니였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흐느껴 울었다.   
  사실 아내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나를 만나 그렇지 않아도 기력이 없는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든 병수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나하고 똑같이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이따금 아이들 때문에 집에 가려고 신촌거리를 지날 때 휘황찬란한 불빛과 거리를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 골목길로 들어가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극히 평범한 생활들-없는 반찬이라도 맛있게 먹고 잘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내는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오늘이 있기 훨씬 전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과 병마와 싸워야 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것이 포기되고 죽음을 기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제나 건강하여 그림을 그리며 이따금씩 상업 미술도 하면서 아내와 두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던 나는 2001년 처음 간경변 진단을 받고 한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공기좋은 곳에서 아이들 학비 걱정안하며  병도 치료하고 살아야겠다며 떠난 이민길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헛된 환상이 되었다. ‘곧 나오겠지’하고 기다리던 비자(장기사업비자)는 차일피일 연기됐고, 비자가 없는 상태에서 병원 한번 가려면 그곳의 의료시스템에 따라 몇단계를 거쳐야했으며, 그때마다 무척 비싼 진료비가 청구되었다. 동네의원 같은 곳에서의 진료비가 보통 50만원이 나왔고 그나마 통역을 위해 데리고 간 통역사는 의료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B형간염인지 C형간염인지를 두고 의사와 실랑이를 하다가 급기야 의사가 두꺼운 의학서적을 한참을 읽고 난 후 진료하는 등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되었고 그럴 때마다 그곳에서의 의료적 신뢰는 떨어져만 갔다.

가족 이미지  “언제나 건강하여 그림을 그리며 아내와 두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던 나는2001년 처음 간경변 진단을 받고 한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공기좋은 곳에서 병도 치료하고 살아야겠다고 떠난 이민길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자획득자격이 강화되면서 영어회화능력이 부족한 나는 비자를 취득할 가능성이 더욱 어려워졌고 두 아이(초등2, 중등1)의 한 학기 학비가 500만원이 넘게 나왔다. 철저하게 조사하고 미리 준비를 많이 한다고 했으나 그곳에서 시작한 바(bar)는 장사는 그럭저럭 잘되었으나 세븐데이(일주일 휴일없이 일함)인 관계로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사춘기 정체성의 혼동으로 시작된 딸아이와의 작은 다툼이 급기야 폭력으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가정 폭력범’이 되어 그 곳 법정에 서는 지경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휴식이 없는 힘든 생활과 여러 가지 이민의 스트레스로 심하지 않았던 병은 다시 극도로 악화되어 복부가 팽창되고 가슴에 물이차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먼저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한달후 거의 실신상태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과정에서도 혹시 공중을 날다가 환자가 사망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골치가 아파서인지 도무지 비행기에 실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그곳 목사님의 부탁으로 겨우겨우 비행기 좌석 5개를 길게 차지하고 누워 한국을 떠난 지 4년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서울을 떠나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에서 고향인 목포로 내려왔으나 계속되는 병마로 2006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형님의 간상태가 좋지않게 검사가 나온 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병실을 찾은 주치의에게 나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 너무 아프고 괴로워 내가 좋아하는 던킨도너츠에 시원한 바나나우유 한잔 마시고 죽고 싶습니다. 선생님.'  모기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것.. 참! 지금 이 순간에도 식욕이 있으시다니 환자분은 살겠소!”  ‘당신은 살겠소’ 선생님의 이 말은 그 후 그대로 사실이 되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대로 아내는 서울대학교병원 간이식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위급한 환자로 분류되어 만약 장기기증자가 나타났을 경우 맨 처음 1순위로 기증받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간이식센터 관계자도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국내의 수많은 병원에서 많은 환자가 대기하고 있어 기증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2주, 다시 말해 2주 안에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뒤로 밀려나고 다른 환자가 또 다시 2주 동안 제1순위가 되어 대기하는 것이다. 일 년 365일 중 14일, 그 안에 기증자가 없으면 나는 죽는다. 기증자는 극소수이고 대기자는 많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  .  이렇게 무심히 하루하루가 갔다. 아내는 여기저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자는 제안까지 나에게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였다. 죽으면 죽었지 생판 모르는 중국까지 가서 수술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병실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에서 수술하고 돌아온 많은 환자들을 보았지만 수술 후 휴우증으로 담즙이 흐르고 재입원을 자주하는 등 많은 환자들이 고생을 하다가 다시 병원신세를 지는 것을 많이도 보아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좌우간 나는 중국에는 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필요가 없으면 데려가실 것이요. 조금이라도 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살려주실 것이다’라는 무지하고도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나에게는 있었다. 본래 조금은 낙천적인 성격도 이때 한몫했다.   

  14일 중 10일이 지났다. 또 2일이 지났다. 이제 남은 시간은 48시간. 이 48시간 안에 간 기증자가 있어야 했다. 기증자가 있더라도 혈액형이 다르면 안된다. 일 년 365일 중 손으로 꼽을 정도로 작은 기증자 중에, 이 14일 안에 나타나야 나는 살 수 있었다. 이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간 기증자를 기다리며 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나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오로지 한 생명,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4명의 의사가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며 통증을 참으며 머리를 침상에 박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날 오후- 정확히 말해 2006년 2월 8일 오후 4시경. 병실 밖이 웅성웅성 시끄럽더니 주치의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윤강신 환자분! 장기 기증자가 있습니다. 지금 병원 관계자가 대구 00대학교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말아주십시오. 만약 장기가 심하게 약물에 오염이 돼있으면 불가능합니다.”  나와 아내는 이 뜻하지 않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내는 주치의 선생님의 팔을 부여잡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묻고 또 물었다  “정말이세요? 네? 선생님! 정말이요?”  “네! 사실입니다. 지금 직원 4분이 대구로 떠납니다!”  

  선생님은 황급히 병실을 나가고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의사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들은 모두 자기의 일인 양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환자분! 축하해요! 이건 정말 기적 같네요!”  기적!! 그래 이것은 분명 나에겐 기적이었다. 그 시각 4명의 의사선생님들은 눈보라치는 2월의 밤을 가르며 KTX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에게 장기를 기증한 분이 대구의 00대병원에 계셨고, 워낙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앰뷸런스 대신 기차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출발하기 전 그들은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기증자가 약물에 심하게 장기가 오염되어 계시면 그냥 빈손으로 올라 올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지금 이 시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4명의 의사가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가고 있다. 그들도 갑자기 발생한 상황이었기에 개인의 모든 스케줄을 포기하고 오로지 한 생명,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며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머리를 침상에 박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눈보라를 잠시만 그쳐 주십시오! 그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조금만 그쳐 주십시요!”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종교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렇게 간절히 기도를 올려 본적이 없었다. 이 기도가 비록 나를 위한 이기적인 기도일지언정 정말이지 그 날의 그 기도는 지금 생각해도 진실되고 진실된 기도였다.   

  장기는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다음날 2월 10일 오전 10시 수술실로 이동한 나는 11시간 동안의 수술을 받았다. 아련한 꿈속에서 “좋아~잘됐어”했던 소리는 지금도 그것이 꿈인지, 아니면 정말 마취 속에서 잠깐 들었던 생시인지는 몰라도 분명 이 말을 알연히 들었다.   
  수술 후 2번의 사경을 헤맨 후 모든 것을 이겨내고 얼마 후 회복실로 이동되었다. 그 곳에서 검사의 한 방법으로 오른쪽 검지손가락에 조그마한 전구를 붕대로 감아 고정시킨 후 전선을 연결하였는데 끝에서 빨간 꼬마전구가 깜박거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아들녀석은 그 모습을 보며 “히야~아빠. ET같다”하며 좋아했고 뉴질랜드에서부터 서먹했던 딸아이는 너무나 변해있는 아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나의 손을 잡으며 연신 울음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온몸에 감겨있는 붕대와 주사바늘과 복잡한 기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은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을 법 했다.  
  “미안해 아빠! 정말 미안해!”  “아니야! 아빠가 잘못했다. 아빠가 나빴어! 그래서 죄를 받은 거야!”  딸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아내도 따라 울었다. 나에게 몹쓸 병이 찾아와서 나를 괴롭혔지만 우리 가족은 이 순간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몸은 아팠지만 가슴은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미술을 전공한 나는 병실에서 나를 치료하던 사진을 좋아하는 의사선생님 한 분과 우연히 만나 나를 치료하면서 사진에 대하여- 또 사진과 그림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화를 하며 수술 후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가 직접 찍어서 서울대학교병원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진작품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강한 빛을 이용한 작품마다에는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실려있었다.
  지금도 후회 되는 것이 하나가 있다. 나를 위해 수고해주신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의 사진을 몰래 찍어서 그다지 잘 그리지 못하는 그림실력이나마 그들의 초상화를 수채화로 그려서 꼭 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실천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러면 지금도 혹 이식병동을 가면 벽에 그림이 붙어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간 기증자를 기다리며 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나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오로지 한 생명,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4명의 의사가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며 통증을 참으며 머리를 침상에 박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나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병원을 찾는다.

  외과와 신장내과. 신장은 면역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CT와 초음파를 찍고 있다. 그러나 워낙 낙천적인 나는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의사의 지시를 철저하게 신뢰하고 따라 수술 후 3년이 지났지만 후유증은 단 한 번도 없이 건강하게 살고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떠나신 그 분께 엎드려 무릎꿇고 감사와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 싶지만 알 길이 없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생을 살다가 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살려준 소중한 그 분과- 눈보라를 헤치며 새벽길을 달려나간 4명의 의사선생님, 그리고 11시간의 긴 시간 동안 나를 살리신 수술담당 주치의선생님과 미술과 사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며 고통을 이기게 도와준 수술후 담당선생님, 그리고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요리조리 돌보며 치료하고 돌봐준 간호사 선생님들, 감사, 감사합니다.   

  받은 이 은혜, 언제나 남에게 베풀며 이웃을 사랑하며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성실하게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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