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

컴퓨터라는 물건의 발명은 꽤 오래 전이지만, 그것이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9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겨우 30여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디지털을 떠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디지털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 문명과 그로 인한 삶의 변화 양상을 한데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디지털의 무지막지한 진군은 지금도 여전히 막무가내의 진행형이어서, 그 속도는 디지털답게 초고속이며 그 양상은 디지털답게 최첨단이다. 심지어 벌써 디지털이라는 말조차 낡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바야흐로 AI나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용어가 디지털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지난 2016년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AI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결과는 AI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이 대결은 단순히 인간과 비인간이 바둑으로 승부를 겨뤘다는 흥미 유발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의 관계에 대해, 혹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그래서 인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계기였던 것이다.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에 대한 고민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중심의 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생존해 왔다. 인간의 인간다움, 즉 휴먼(human)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오랫동안 인문학적 사유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휴머니즘(humanism)은 인간의 존엄과 인본주의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인류 문명 발전의 토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디지털 기술 혁명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스트휴먼 시대의 갑작스러운 도래는 그동안 누려온 인간의 지위를 순식간에 흔들고 있다. 휴먼과 포스트휴먼, 즉 인간과 인간 아님, 혹은 인간과 인간 이후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스트휴먼을 둘러싼 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제기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현재 인본주의는 도전받고 있으며, 인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신뢰 역시 흔들리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상상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일련의 SF 영화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SF 영화의 고전으로 언급되는 <블레이드 러너>를 비롯하여, <터미네이터>, <로보캅>, <매트릭스>, <A.I.>, <트랜스포머>, <아바타> 등의 영화는 모두 인간과 기계(컴퓨터, 사이보그, 로봇)의 관계를 기본 스토리로 삼고 있다. 즉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의 대립이나 갈등, 공존이나 충돌 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상력은 이미 동서고금에 걸쳐 인간을 꿈꾸는 동물이나 귀신 등의 이야기를 통해 익숙한 바 있다. ‘단군신화’에도 말하자면 인간을 꿈꾸는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일련의 SF 영화들은 인간을 꿈꾸거나 인간과 갈등을 겪는 대상을 동물이나 귀신으로 설정한 게 아니라, 컴퓨터나 로봇 등으로 바꿔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변화는 그만큼 우리의 삶과 세계가 포스트휴먼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성큼 진입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간의 인간다움과 연민

포스트휴먼, 즉 인간 이후에 대한 사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고민과 함께, 그렇다면 과연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본질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구분하여 인간다움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하고 강조하려는 노력을 오랫동안 기울여 왔다. 때로 인간답지 못한 인간을 가리킬 때 ‘이런 짐승만도 못한 x’ 혹은 ‘짐승 같은 x’이라고 욕을 하는 것도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와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좀 엉뚱한 얘기를 하나 해보자. 요즘 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이 높다. 현재까지는 그 기술이 완벽한지 어떤지는 불확실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어쩌면 인간이 운전대를 잡으면 그 자체로위법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러는 술을 먹고도, 혹은 졸면서도 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AI 자율주행차는 음주운전이나 졸음운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인간의 불완전함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속성의 하나라고 간주될 수도 있다. 인간은 여전히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며, 서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전쟁을 일으켜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심지어 털 없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하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불완전함만으로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 혹은 인간과 AI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요즘과 같은 AI와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의 인간다움은 어쩌면 연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감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에 의하면 연민이란 타인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 의해 초래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한다. 굳이 이런 정의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동양에서 흔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서로 일컬어지는 연민의 감정은 인간만이 예로부터 지녀온 덕목이다. 인간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의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도 이런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심지어 일련의 SF 영화들을 통해 보면 그 연민의 대상은 때로 AI로 대표되는 컴퓨터나 로봇을 향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은 바로 지금과 같은 AI와 포스트휴먼 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강연호 시인·원광대학교 교수 시를 쓰며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문학과 시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시집으로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기억의 못갖춘마디』, 『하염없이 하염없는』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