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고립보다 무서운 건 정서적 고립

첫 지하철도 출발하지 않은 새벽 4시 30분. 입원 침대 위 불이 켜지고 능숙한 몇 차례 손길이 끝나면 내 피는 임상병리실로 이동된다. 바늘이 선명하게 일깨운 의식은 다시 잠에 빠져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3시간 남은 아침 식사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병실 커튼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하루가 시작된다.

대기와 기다림은 입원 환자의 숙명이다. 추가 검사, 협진이 있을 때만 병실 밖으로 나가지만 그 순간은 대체로 짧디짧다. 더구나 면역력이 취약한 혈액암 환자는 입원 환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의 격리 대상이다. 우선, 감염에 취약해서 면회는 제한된다. 게다가 내가 진단받은 급성림프모구성 백혈병은 항암치료를 할 때마다 1개월가량의 입원이 필요했다. 완벽한 치료를 위해 몸의 면역 세포를 전부 없애고 타인의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공여받는 이식 수술 직전에는 고시원 크기의 무균실에서 3주가량을 홀로 지냈다. 의료진과의 대화마저 수화기를 통해야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물질적 격리를 넘어 죽음·치료 결과·불투명한 미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당시의 시간은 더 이상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정서적 고립감마저 극대화시켰다.

인내심은 경험해 보지 않은 고통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혈액암 진단, 항암치료 중간 성과 점검, 심지어 완치 판정을 위한 마지막 절차이기도 한 골수 검사를 하려면 두꺼운 주삿바늘로 척추뼈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뼈를 뚫고 들어가는 바늘의 통증은 마취제로 억제할 수 없다.

얇은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 혈액검사도 녹록치 않았다. 입원 기간이 길어져 혈액 채취를 할 혈관이 모두 메말라 발등에서 혈액을 채취할 때는 고통을 인지하는 신경 감각이 미워질 정도였다. 고강도 항암 약물 주사 후 식도를 불태우는 것 같은 화끈함을 선사하며 올라오는 형광색 위액 등 신체가 체감할 수 있는 고통의 영역은 무궁무진했다. 입원 생활은 인내심만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 기간이었다.

해답은 언제나 시간이 찾아줬다

입원 기간 동안 고립·격리·고통의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다. 어린 소아암 환자들을 보며, 완치된다면 누군가를 돕겠다는 새로운 의지를 다졌다. 생각 말고는 할 일이 없었던 입원실은 앞만 보며 달려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인생의 궤도를 재점검할 시간을 제공했다. 2번의 재발을 거치는 사이 죽음을 막연한 미래가 아닌 닥친 현실로 인식하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바뀌었다. 이렇게 내가 겪은 질병과 장애의 기록은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고, 덕분에 ‘작가’라는 과분한 호칭도 얻게 됐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마침내, 8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1차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9할은 병원에서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이었다. 고통의 순간이 쌓이다 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던 고통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여유를 갖게 됐다. 예상보다 길어진 입원 치료 기간에는 우울한 날도 많았지만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퇴원 날짜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입원 기간 중 마주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난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시간이 찾아줬다.

마지막 입원 치료가 끝난 후에도 추적 관찰을 위해 병원을 꾸준히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치료받던 병원 근처를 지날 때면 고통의 순간이 불쑥 떠올라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이 고통 역시 점차 희미하게 만들어 요즘 병원 곁을 지날 때면 익숙한 감정이 앞선다. 4월에는 완치 판정 이후 1년 만에 주치의 선생님을 만났다. 봄기운을 머금은 병원 풍경이 나를 응원하는 듯했다.